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턴 1세 (문단 편집) == '황제' 이전의 생애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85.servimg.com/norton10.jpg|width=100%]]}}}|| ||<:>{{{-1 상인 시절의 사진.}}} || [[영국]] [[런던]] 출신으로, 그가 어릴 때 가족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으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이 [[상업]]에 종사해서 돈을 제법 벌었고, 노턴 또한 그의 아버지의 항해 용품 사업에 동참했다. 1848년에 노턴은 끔찍한 일을 당했는데, 그의 일가족[* 아버지, 어머니, 2명의 형제]이 사망하는 참사를 겪었다. 이후 노턴은 남아프리카를 떠나 [[리버풀]]을 거쳐 1849년에 [[골드 러시]]가 터진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노턴은 금보다는 다른 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부동산]]에 투자하고 잡화점을 여러 개 내어 제법 성공을 거두었다.[* 노턴이 양친의 가산 4만 달러를 갖고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거나, 1853년까지 25만 달러를 모았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동시기 어느 기록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http://emperornortontrust.org/blog/2017/4/12/open-question-no-2-did-joshua-norton-really-arrive-in-san-francisco-with-a-40000-inheritance-that-he-parlayed-into-six-times-that|#]] 물론 이와 별개로 노턴이 캘리포니아에서 사업을 하면서 큰 돈을 벌었던 것은 사실이다.][* 링크의 글에 따르면 노턴의 아버지는 죽기 불과 4년 전에 자신의 형에게 "완전히 망했다(I am totally Ruined)."라면서 신발 살 돈도 없다고 푸념을 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1849년 당시 4만달러라면 2023년 기준으로는 150만달러 이상에 해당하는 상당한 거액인데, 죽기 얼마 전까지 파산 위기에 몰려있던 아버지가 저 정도 유산을 물려줬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두 번째로 노턴이 파산했을 당시인 56년에 새크라멘토 유니온 신문에는 은행이 그의 재산을 가압류한 내용이 나와있는데, 이 내용에 따르면 그의 자산(assets)는 1만5천 달러(2023년 기준으로 약 53만 달러)에 불과했다. 그가 사업과 변호사비로 날린 돈을 감안하더라도 25만 달러에는 턱없이 모자란 액수였을 것이다. 참고로 당시 25만 달러면 현재 가치로 970만 달러가 넘는 거액이고 백만달러는 3천500만 달러에 달한다. 실제로 노턴의 재산이 25만달러에 달했다면 쌀 계약 실패로 타격을 입었을지언정 파산하진 않았을 것이다. 노턴의 재산이 저것의 10분의1 수준이라고 하더라도 지역사회에서 꽤나 여유있는 축에 속했을 것이다.] 실제로 골드 러시 초기의 캘리포니아는 금을 캐러 온 사람들은 넘쳐나는 데 반해 그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물자는 턱없이 부족해서 물가가 살인적인 수준으로 높았고,[* 동시기 캘리포니아에서 금을 캔 사람들 중 하나인 [[https://en.wikipedia.org/wiki/Edward_Gould_Buffum|에드워드 굴드 범]](Edward Gould Buffum)이 쓴 수기 <금광에서의 6개월(Six Months in the Gold Mine)>에서도 친구와 함께 먹은 아침식사 한 끼가 지금 돈으로 무려 1,200달러, 한화 150만원에 달했다는 믿기 힘든 내용이 나온다.] 당연히 금을 캐러 온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편이 직접 금을 캐는 것보다 훨씬 수입이 짭짤했다. 계란 12개가 당시 돈으로 3달러, 지금 돈으로 100달러에 가까울 정도였다.[* 참고로 동시기 [[뉴욕]]의 노동자들이 받는 일당이 1달러에서 2달러 정도였다.] 실제로도 '''[[골드 러쉬]]를 꿈꾸며 온 광부들보다는 그 광부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들이 더 돈을 잘 벌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청바지]]를 만들어서 판매한 [[리바이스|리바이 스트라우스]] 같은 사람이 있다. 당시 [[캘리포니아]]는 [[청나라]]로부터 [[쌀]]을 수입하고 있었다. 의외로 미국은 스페인, 프랑스 등 일부 유럽 국가의 식문화와 노예로 들어온 흑인들의 영향으로 17세기부터 쌀을 먹었는데[* 때문에 미국에는 [[잠발라야]] 같은 쌀 요리도 있다.], 물론 당시 미국도 동부와 남부 해안지대에서 쌀농사를 짓긴 했지만 이 당시에는 [[파나마 운하]]도 없었던데다 이 쌀을 캘리포니아로 운송해줄 철도망도 부실해서[* 참고로 파나마 운하는 1914년,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이어주는 대륙횡단 철도는 1869년에 가서야 완공되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쌀을 먹으려면 쌀을 수입해와야만 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하필 청나라에서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고 기근이 들어 1852년 12월 청나라에서 쌀 수출금지령이 떨어지자 본래 4센트였던 쌀값이 9배인 36센트까지 폭등한다. 그러자 노턴은 [[페루]]에서 한 업자가 쌀을 수입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쌀 시장을 자신이 장악하기 위해 2만 5천 달러를 주고 그 쌀을 모두 사들였다. 하지만 노턴의 생각과 달리 페루에서는 계속 쌀이 들어왔고 쌀값은 순식간에 36센트에서 3센트로 떨어지게 되었다. 노턴은 큰 손해를 볼 위기에 처하자 쌀 품질 핑계를 대며 [[손절|급히 계약을 취소]]했지만 3년간의 법정다툼 끝에 1856년 캘리포니아 주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패소했고 결국 1858년 [[파산]]하게 된다. 다만 재판에서 패소하고 파산한 이후에도 샌프란시스코에서 상품 판매를 중개하면서 근근히 먹고 살았다고 한다. 물론 빈궁한 삶은 면할 수 없어서 허름한 하숙집에서 사는 신세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당시 샌프란시스코는 [[골드 러쉬]] 붐이 식어가며 경제가 불황에 빠졌는데, 일설에 의하면 노턴은 이 시기부터 주변인들에게 만약 본인에게 권력이 있었다면 상황이 지금보다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